자작

안경

(주)CKBcorp., 2012. 6. 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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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 나가볼까.


더위는 많이 잦아들었다. "꼿 돟코 여름 하나"인 계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정도 날씨라면 밤운동 하기에 나쁜 날씨는 아니다.


밤에 뛰는 호수는, 낮의 모습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다. 고즈넉한 잔영들과 파스텔톤 가로등들이 발길을 이끈다. 곧 이곳도 알록달록 운동복과 모자와 이어폰을 낀 사람들로 북적이겠지만, 그런들 어떠랴. 땀 흘린 후 상쾌함을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나 같을 것을. 나는 평소처럼 안경을 벗고 호수공원으로 나섰다.


요 며칠, 눈길이 가는 처자가 있다. 

대략 자시 경에 자주 눈에 띄는데, 운동에 충실한지 흐트러지는 실루엣이 보이지 않는다. 피부 또한 백옥같고 어찌보면 빛나는 듯 하며, 발걸음 옮길수록 긴머리가 들썩들썩 하는 것이, 마치 망아지가 들판에서 뛰노는 듯 하다. 갸름한 얼굴선이 스마트폰 불빛인 듯 한 것에 비칠때면, 그 선히 과히 매혹적이다 아니할 수 없다. 더불어 섬섬옥수라, 가늘고 긴 손가락과 팔목 선, 시원하게 걷어올린 소매와 팔목, 어께선은, 언제 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신선하다. 


아직 한밤은 어둡고, 어염집 규수를 빤히 쳐다보기엔 바르지 못함이 있어서 자세히는 보지 못하였으나, 그 자태, 선, 피부만으로도 과히 못 남성들을 설레게 할 만 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 또한 뭇 남자에 지나지 아니하여, 매일 한밤 처자를 볼 때마다 숨이 가빠지고, 낮 동안은 처자 생각이 자꾸 떠올라 일에 집중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하여, 나는 결심하였다. 이리 두근거려 가슴을 앓느니, 내가 다시 호수공원을 못 가는 일이 있더라도, 말을 건네 보리라. 이대로 계속 지내기엔, 피끓는 젊은 청춘이 너무나 아깝지 아니한가!


2.

호수 공원에서 그녀를 만나, 가벼운 인사를 시작으로 담소를 나누는 것이 내 하루의 일상이 되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즐거웁다. 한밤이 되어 그녀와 나눌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이 즐겁다. 운동으로 다져진 내 팔과 가슴과 등과 배와 허벅지와 다리를 보여주는 것이 뿌듯하다. 맵시나는, 하지만 새로 산 티가 나지 않는 운동복과 신발과 양발과 팔목띠를 고르는 것이 즐겁다. 이번엔 꼭 렌즈를 사리라. 그래야 운동중에도 그녀의 모습을 선명히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내가... 내가 렌즈를 낄 생각까지 하다니!! 


나는,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다.


3.

"무슨 일 있어? 안경은?"

직장 동기가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에 이어 벌써 네 번째다. 역시나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지나 보다. 그렇게 빨리 티가 나나? 진작 안경 벗고 다닐 걸 그랬나?

"무슨 일은. 그냥 운동 좀 열심히 할 뿐이지."

"그래? 밤일 하는 거 아냐? 얼굴이 반쪽이네. 어디 헬스크럽 다니나 보지?"

"아니, 잠실에 호수공원 있잖아. 거기 잠깐 뛰는 거지 뭘."

"그래? 거기 기껏해야 2km 도 안될텐데, 그걸로 운동이나 되나? "

"아...너 모르는구나. 거기 정말 이뻐. 사람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고"

"하긴, 니 몰골 보면 운동이 안 되는건 아닌거 같고... 응? 잠깐, 너.... 거기 운동하러 가는 거 아니구나! 언능 불어 이 자식아!!"

"아냐! 딴 일은 무슨! 나 열심히 뛴다고! 궁금하면 나 뛰는 거 와서 보던가!" 

"... 너 내가 잠실로 이사간 거 몰랐지? 오늘밤에 야간 배틀 콜? 치맥 내기다?!"

"어? 어....어."


4.

아... 내가 왜 거절을 못했지? 오늘 그녀를 만나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 나는 그녀를 이녀석에게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우리가 아직 그정도로 친분이 쌓인 건가? 혹시 친구라고 소개했다가 그녀가 싫어하면? 아님 그녀가 어색해 하면? 아~ 정말 애매하네~

"어이! 뭐해? 돈은 가져 왔냐? 운동복 입었다고 배째라 카면 안된다? 다섯바퀴 10Km. 5분까진 접어준다. 양호?"

어? 저기 오는거 그녀...아닌가?

"야. 너...먼저 출발해. 먼저!"

"어? 진짜 나 먼저 출발해도 돼?.....어?"


그녀석도 봤나 보다. 그녀의 모습을....


"어?"/"어?"

녀석과 나는 동시에 외쳤다. 그리고 죽울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아래 그녀의 실루엣은, 어깨까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가슴 아래가 없는 거다!!.  마치 게 처럼, 얼굴과 목, 어께선만의 모습이고, 긴 팔을 다리처럼 앞뒤로 휘적휘적 움직이며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미친 듯이 뛰어 사람이 많은 길가 편의점으로 왔다. 이미 술 따위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녀석이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 건네며 말했다.

"야! 아까 그거 뭐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야?"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그냥 이쁘고 잘 빠진 여자라서 말 좀 건네본 것 뿐이라고! 그러다 친해진 거고!" 

"미친 새퀴! 아무리 여자가 좋다고 귀신을?! 아주 살림 차리지 그랬냐?"

"... 살림... 우리 집.."


맞다! 나 뿐만이 문제가 아니다! 귀신은 초대해야 갈 수 있다던데, 내가 어제 그녀...그 귀신에게 집 주소를 알려줬으니!! 빨리 집에 전화를...


그때였다. 핸드폰 전화기가 울렸다. 어무니 핸드폰 전화번호다. 

"엄마! 나 정훈인데! 집에 누가 벨 눌러도 절대 열여주지 말어! 알았지! 절대로야!!"

나는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응답했다.

"..... 정훈씨...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오세요...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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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좀 뻔하긴 한데... 고치기가 귀찮다. 
언젠간 고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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